김광태 IHF 회장 당선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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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IHF 회장 당선자는 누구인가?
  • 전양근 기자
  • 승인 2011.06.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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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병원연맹(IHF) 회장으로 당선된 김광태 회장의 면면과 의료계 안팍에서의 활동상을 조명해 본다.

김광태 IHF 회장
▇힘든 유년 시절…불굴의 정신력 함양

김광태 회장은 1937년 1월 충남 온양읍(현 아산시) 읍내리에서 부친 김창운씨와 모친 진매란씨 사이의 4남5녀중 3남으로 태어나 그해 서울 영등포로 이사왔다.

서울에서 성장해 43년 우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은 2차대전 중으로 김 회장 가족은 전쟁의 위협을 피해 서울에서 온양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는 식량이 아주 귀해 옷과 쌀을 교환해 먹던 시대로 밥도 쌀과 보리가 섞인 감자밥으로 감자 한 개를 들이대면 밥이 없을 정도로 어렵던 시기였다.

유년시절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그의 근검절약 정신과 강인한 정신력, 추진력이 배양됐을 것이다. 온양으로 전학했다가 46년 우신초등학교로 재전학했으며 49년 성남중학교에 입학해 55년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의대에 진학했다.

▇어머니 병환서 의학도 꿈꿔

김 회장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이 항상 남을 돕는 분이었다며,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고통을 겪자 성장해서 어머니 병을 꼭 고쳐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됐고 그것이 의학도가 되는 동기가 됐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학창시절을 큰형님댁에서 보낸 김 회장은 오늘보다 내일의 생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형님을 통해 평생 일을 소명으로 삼는 생활자세를 익혔다.

55년 고3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게 되자 무조건 재수를 결심했지만 누님과 형님의 강력한 권유로 가톨릭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김 회장은 그때 권유를 존중한 것을 잘 된 것으로 생각한다. 더 잘될 수 있는 확률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인 도전보다 끊임없는 도전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 끝없는 도전정신이 마침내 세계 병원대통령인 국제병원연맹(IHF) 회장을 거머쥐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 반려자, 병원경영 동업자

의대를 마치고 수도병원 외과 수련의 시절 친척 소개로 평생 반려자인 변주선 여사를 만나게 된다.

김 회장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성격인 반면 변 여사는 모든 일을 신속하게 결정하는 타고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김 회장 부부는 거의 매일 한 시간정도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모든 것을 가족과 같이 의논해오고 있다. 그는 아내와 결정하는 모든 일에 대부분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됐고 목표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술회했다.

김 회장은 오늘의 병원이 있기까지 탁월한 판단력으로 병원을 운영하는데 아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훌륭한 동업자임을 밝혔다. 

▇참 의료인의 자세로 인술 40여년

남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하는 일은 삼가는 마음이 깊고 따뜻한 분. 그리고 '달리 자신을 드러내려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 의인'…그를 만나면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갖게된다.

그만큼 김광태 회장은 자신에게 철저하면서도 환자와 지인에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박애정신에 투철한 의사라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1960년대 말 전반적으로 사회가 어려웠던 시절 의사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지역주민의 건강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봉사정신으로 첫 발을 내디뎠던 그 시절로부터 40여년이 흘렀다.

대림성모병원은 개원당시 20개 병상이 이제는 317개 병상으로 최고수준의 의료진과 시설장비를 갖춘 종합병원이자 인턴․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발돋움했다.

1995년에는 음성성모병원을 개원(기존 병원 인수)해 어려운 환경속에 고통에 시달리는 농촌 환자들에게 질 높은 의료혜택으로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참의료인의 자세로 인술을 폈다. 하지만 워낙 (경영)여건이 안좋아 막대한 손해(희생)을 감내하고 부득이 손을 떼는 아픔을 맛보았다.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갑상선 부문 정평, 전문특성화 이룩

올해 42년째를 맞은 대림성모병원은 전문특화병원으로서 김 회장 자신이 외과 전문의인 만큼 수술 잘하는 병원, 갑상선 등 일반외과, 위장전문, 유방전문병원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특히 갑상선센터는 2011년 현재 갑상선암 수술 3천례를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전문센터로 명성을 쌓았다.

대림성모병원은 지난 2005년 불모지나 다름없던 갑상선 고주파 열치료 영역을 선도해 갑상선 고주파의 의료신기술 선정에 기여한 바 있다.

의사는 자기가 전공한 과로 일평생을 살아가고 그에 따라 성격, 판단, 결심, 가치관도 결정된다. 김 회장은 수술실에서 집도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수술실에서는 오직 진실, 성실, 최선만이 인정되고 보장되는데 물론 그 보상은 환자가 잘 낫는 것이다.
김 회장은 대체로 머리가 좋은 외과의사가 수술한 환자보다 성실하게 환자와 함께하는 자상한 외과 의사의 환자들이 통계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고 믿는다.

요즈음 대부분 의사들이 외과수련의를 기피하여 인기없는 과가 됐다고 하지만 외과처럼 모든 과와 연결된 중요한 과도 없다는 재삼 강조한다.

▇병원에선....경영원칙 등

김광태 회장은 아침 6시30분이면 병원에 출근한다.

눈을 뜨자마자 병원일을 연구하는 김 회장은 병원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시한다. 진료, 교육, 연구 등도 중요시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조직체로서 힘을 가질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는 69년 개원이래 병원 시설을 꾸준히 늘려왔으며 그에 따른 의료장비를 보강해왔다. 병원이 커지면서 나타날 수 있는 경직되고 사무적인 업무태도를 경계해 병원 직원들이 서로 한 가족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매월 조회때마다 특히 인성교육에 신경을 많이 썻다.

김 회장의 병원경영 원칙은 첫째, 모든 지휘체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두어 의사결정이 중간관리자 선에서 이루어지게 하며, 둘째 직원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키워주고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최선의 여건을 제공하는데 두고 있다.

김 회장은 'Change'를 구호로 내걸고 당선된 오바마 대통령의 예를 들며 우리도 신뢰를 바탕으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병원경영에서도 신뢰(Confidence), 일관성(Consistency), 연결( Connection), 용기(Courage), 변화(Change) 등 5C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로터리활동 등 봉사 생활화

인술을 펼치면서 짬을내 기회있을때마다 봉사활동을 생각하고 몸소 실천에 옮겼다.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오랜세월 봉사해온 김 회장은 로타리를 통한 사회봉사, 장학사업 등, 남을 돕는 일이라면 서슴치 않는다.

김 회장은 의업에 대한 애착 만큼 직업을 이용해 기지고 있는 지식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한다. 봉사가 몸에 밴 것이다. 김 회장의 끊임없이 펼치는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국제로타리 이사로 활동했으며 국제로타리클럽 3640지구 총재로 추대되어 회원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골든 센츄리상’을 수상했으며, 98년 보건의날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김 회장은 “누구나 등산을 하며 정상에 오르고 싶어하는데 정상에 오르려면 일찍부터 정상에 뜻을 두고, 힘이 들더라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오르는 자에게 기쁨이 올 수 있다”며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김 회장 가족
▇의료인으로 一家(일가) 이뤄

오늘이 있기까지 김 회장을 도와 병원살림을 도맡아 해온 아내 변주선 여사는(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병원 행정원장으로, 한국걸스카우트 총재, 세계걸스카우트 아태지역 의장, 한국아동단체협의회장 등으로 밤낮없이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변 여사와의 슬하에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김상임(첼로), 김정화(바이올린) 두 딸과 장남 김성원 씨를 두었다.

장남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메모리얼 슬론-캐터링 암센터(유방분과 전임의)를 거쳐 현재 분당서울대병원 일반외과 교수이다. 큰 사위(이성원)는 서울의대를 마치고 삼성서울병원 비뇨기과 교수이며 작은 사위(김용석)는 미국 뉴욕의대를 졸업하고 St.Mary's Eye & Surgery 센터 병원장이다.
의료인의 일가를 이루었다.

이쯤되면 자녀에 대한 관심 또한 얼마나 컸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인술로, 병원경영으로, 가정경영의 성공 비결은 곧바로 로타리 이념인 초아(超我)의 봉사 그대로 사회봉사 실천으로 이어진다.

▇한국 병원계 수장으로서 공적

김광태 회장은 병협회장 재임시 국제병원연맹 총회를 한국에 유치했다. 그는 외국의 병원경영자를 불러들여 그들의 경영 노하우를 들어보고, 그런 기회를 통해 우리 정부가 병원계의 어려움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서 국제병원연맹 총회 유치를 생각했다.

김 회장이 국제병원연맹 총회를 유치하기 위한 시도는 회장취임 직후부터 시작되었지만 한국유치의 윤곽이 확실시 된 것은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병원연맹 총회 때이다.

김 명예회장은 이 때 협회 임원진인 병원장들을 대동해 이 총회에 참석, 외국 참가자들에게 한국개최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이러한 활동 덕분으로 그 다음 해 두바이에서 열린 지역회의에서 한국개최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김 회장은 “병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실효성 있게 개선하고 해결해 나가려면 이들 분야를 다루는 전문인력이 있어야 하고, 또한 의료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병원관리기법을 개발하고, 선진국들에서 배워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아울러 의료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크게 부족한 만큼 이들 전문인력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병원연맹 총회 유치 등 국제활동의 활성화는 바로 외국의 선진화된 노하우를 벤치마킹하여 우리의 기대를 성사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병원협회가 법정단체로 거듭난 일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쾌거였다고 회상한다.

병원협회 자체의 위상은 둘째치고라도 회원병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협회는 협회의 법정단체화를 서둘렀고 마침내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김 회장은 “병원협회는 의사협회와 함께 법정단체로서 의료계 리더의 역할을 해 의료정책의 방향을 일관성 있게, 합리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2007년 11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병원연맹 총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역대 그 어느 행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치루었고, 이 행사와 함께 열린 아시아병원연맹 이사회에서 차기회장에 선출되어 2009년 11월까지 회장직무를 수행해 왔다. 그래서 그의 국제활동에 대한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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