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빈 교수의 파리 살페트리에르병원 연수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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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빈 교수의 파리 살페트리에르병원 연수기 <5>
  • 병원신문
  • 승인 2012.09.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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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의료'에도 프랑스 국민은 신뢰
남을 이해하는 자세 성숙한 진료문화로

살페트리에르병원 신경과의 운동장애 파트에는 20명의 교수가 있는데 각 교수마다 일주일에 3세션 정도 외래진료를 하고 있다.

그리고 병동은 20병상의 입원실을 갖추고 있는데 주 5일만 열리는 병동이다. 그래서 환자는 최소 3일에서 5일간 입원이 가능하며 개원의나 다른 신경과 의사로부터 의뢰된 환자를 입원시키는데 신경학적으로 판단이 어려운 경우나 약물의 부작용, 혹은 새로운 증상의 출현 등 일반의사가 해결하기 어려운 환자만 입원시킨다.

이곳 병원 퇴원 후에는 곧바로 담당주치의에게로 돌려보내는 시스템이 매우 철저하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간호사도 없고 약국도 없어 적잖이 놀랐다. 이곳 운동장애파트만의 독특한 방식이기는 하나 불필요한 진료나 입원을 하지 않고 의료비를 절감하려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매주 목요일 오전 8시에는 총회진을 실시하는데 모든 교수와 전공의, 학생이 오전 내내 회진을 돌며 환자의 동작을 살피고 신경학적 진찰을 하고 토론하면서 네시간 동안 회진을 돌았다.

그리고 지중해 섬마을에서 의뢰된 환자, 카리브해 프랑스령의 섬에서 온 환자까지 의뢰되어 온 곳도 매우 다양하다.

결국 의료는 문화이고 언어가 통하는 마음 편한 곳에서 받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바람이므로 불어권 지구인들이 모이는 글로벌 병원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과 의료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는데 이는 질적인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언어소통의 어려움과 환자라는 독특한 심리상태에서 본인의 아픔을 충분히 표현하고 의료진은 이를 충분히 들어주어야 하는데 언어와 문화가 생소한 곳에서 아픈 몸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충분히 짐작이 갈만하다.

우리가 짐작하듯 정부 통제 하의 프랑스 의료전달제도는 매우 느리고 비능률적인 면이 많지만 문제는 국민들이 만족한다는 데에 있다.

매우 빠르게 해결되는 우리나라의 의료와 비교했을 때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들 나름의 합리적인 제도를 꾸려가고 있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기 나라의 의료를 충분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느린 속도에 익숙한 프랑스인의 삶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

한국인의 조급함은 단점이기도 하지만 21세기에는 하나의 장점으로 작용하기도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의료문화를 만들어냈다. 누구나 원하면 소위 최고의 국내 의료진을 며칠만에 만날 수 있는 초고속 진료시스템에 국민 대다수가 익숙해져 있는데 이를 합리적인 의료제도로 만들기 위해 제도적으로 제동을 걸었을 때 과연 우리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가 프랑스에서 고속전철 TGV(떼제베)를 수입했지만 우리의 초고속 진료시스템은 왜 아무 나라에서도 수입하지 않는 것일까?

프랑스의 의료전달은 상상하는 대로 매우 느리다. 이곳에서 직접 겪은 일화로 어느 40대 가정주부가 허리가 아파 개원의를 찾았다. 모든 진찰 후 피검사가 필요하다고해 피검사를 동네 검사실에서 해갔다. 주치의 예약부터 피검사 결과를 보는 데까지 무려 2주간이 흘렀다. 그후 주치의는 엑스레이를 찍어야겠다며 처방을 내어 동네 영상의학과에서 촬영을 하고 필름을 들고 다시 주치의에게로 갔다. 주치의는 사진을 보더니 추가로 피검사와 엑스레이 촬영을 처방했다. 그래서 모든 검사결과를 갖추고 다시 환자가 주치의를 찾아가는데 꼬박 3주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내린 결론은 특별한 이상은 없으니 물리치료를 받으려면 받고 휴식을 취하고 진통소염제를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환자는 물리치료사에게 예약을 하고 허리가 아파 주치의를 찾아간 지 한달 만에 물리치료를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물리치료 한번으로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런 방식으로 환자를 보다가는 이 환자는 당장 의사의 멱살을 잡을 것이고 당장 근처의 전문병원이나 대형병원을 찾아 즉시 MRI를 찍고 신경주사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는 등 무엇이든 3일 내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프랑스의 30일과 한국의 3일은 이렇게 같은 환자를 보는데 있어 극명하게 느림과 빠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자 우리는 어느 의료를 선호할까?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한국의 빠른 의료에 익숙해서 당장 약이나 주사를 MRI 찍자고 할 것이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허리가 아픈데 MRI 하나 안 찍었다고 하면 돌팔이 의사나 무능한 의사로 낙인찍어 버린다. 신경학적인 진찰을 통해 특별히 고가의 검사가 필요없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어디에선가 MRI를 찍고 다시 나타나는 환자들을 부지기수로 보게 된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나라 환자들은 허리가 아프면 MRI 검사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내가 차라리 처음부터 처방을 낼 걸 그랬나? 아니 오히려 허리 아플 때 MRI를 찍는 것이 환자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알고 나니 속시원하고 후련하니까. 의사도 좋고 환자도 좋고. 나는 이러한 방식의 의료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잘 모르겠다.

이것이 국가경제에 활력소가 되는지 아니면 소모적인 행태가 될지 분석할 능력이 없다. 다만 나의 윗세대와 내 또래의 베이비부머가 엄청난 노인인구를 형성하게 될 10년 뒤 우리의 자식세대에게 큰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의료는 문화이고 습관이다. 의료의 소비형태를 보면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가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제도가 좋다고 우리나라에 즉각 적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결론이 나는 한국의 의료를 오히려 장점으로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두 나라의 국민성을 보아도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느리디 느린 프랑스의 의료제도가 과연 한국에 참조할 만한 제도가 될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할 일이다.

이 나라 사람들의 참을성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파리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시내 정거장에서 갑자기 운전기사가 모든 승객들을 내리라고 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런데도 참 놀라운 것은 아무도 큰소리내지 않고 내려서 다음 버스를 타고 간다는 것. 이런 일이 종종 있단다. 아마 운전기사가 개인용무가 생겼거나 몸이 아프거나 할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생각을 하며 한마디 군소리 없이 내리는 나라.

우리나라 같으면 이 운전기사는 승객에게 멱살을 잡혔을 것이다. 이렇게 시끄럽게 멱살잡고 욕하고 하면서 발전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무슨 일이 닥쳤을 때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나라가 프랑스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 지는 알 수 없다. 각기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건설된 지 100년 이상 되어 간혹 고장으로 멈추는 일이 있다. 하루는 병원에서 돌아오다가 6호선 전철이 멈춰섰다. 다들 내리라고 지하철 직원들이 안내한다. 또 역시 아무 군소리나 큰 소리가 없다. 정말 이상한 나라다. 우리 같으면 항의하고 욕하고 멱살 잡고 했을텐데.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른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병원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연수를 와 있는 파리 살페트리에르병원에도 외래 진료시간이 있는데 오후 진료는 1시30분으로 예약되어 있다. 그런데 오후3시쯤에 교수가 진료를 시작했다. 복도에 앉은 모든 환자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조용히 기다린다.

나는 참관을 약속했기 때문에 정확한 약속시간에 기다리면서 복도에서 1시간이 넘게 이러한 광경을 안절부절하며 관찰했다. 나만 초조해서 행정 사무원에게 계속 의사가 왜 안 오냐고, 어디 있냐고 물어댔다. 자기도 찾고있는데 모르겠단다. 마침 옆에 앉아있던 지방에서 올라온 신사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자신의 노모는 다른 교수에게 예약되어 있는데 역시 한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노라고. 내가 물었다. 약속시간 안 지키면 화나지 않냐고. 괜찮단다.

유명한 교수에게 진료받는데 이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이 교수에게 예약하느라고 4개월이나 기다렸단다. 진료가 늦게 시작되었는데도 진료하는 교수나 진료받는 환자나 다 느긋하게 차례차례 진료를 받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당장 큰 소리가 나고 적정진료실에 민원 들어가고 해당 의사는 경위서 작성하고 이랬을 텐데. 여기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한단다. 의사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역지사지, 남의 입장을 자꾸 이해해주려다 보면 사회발전이 더딜 수 있는 단점은 있을지 몰라도 서로에게 스트레스는 없으니 느긋한 진료환경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우리의 의료환경은 그렇지 않으니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된다.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재활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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