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거룩한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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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거룩한 계보
  • 윤종원
  • 승인 2006.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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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우정에 관한 판타지. 거룩한 계보

"나요…. 군대 현역 갔다 왔지요? 또 몸뚱이에 문신이라고 한 개도 없지요? 또 뭐요? 응… 순천 지역 유네스코 회원에다가 매년 삼만 원씩 뭐시냐 그 국경 없는 의사회 성금도 낸다 이 말이요. 아 근디 내가 어딜 봐서 깡패요?"

절대 "투사부일체"의 대사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일견 우습지만 마냥 웃기지만은 않다. 이상하게도 이 말을 하며 속 터져 하는 깡패가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룩한 계보"가 기존 "조폭영화"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이면서도 중요한 장면이다. 더불어 이를 소화하는 정준호라는 배우의 가치에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런 캐릭터를 선택한 그의 안목 역시도.

한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던 한국형 조폭영화의 진화를 알리는 작품이 나왔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을 통해 재기 발랄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과시해온 장진 감독은 제작 단계 내내 공약해왔던 대로 색다른 갱스터 무비를 세상에 내놓았다. 충분히 "조폭적"이되, 익히 봐온 조폭영화의 전형을 보기 좋게 비튼 이 영화는 판타지와 코미디, 신파가 기막히게 접목된 잘 만든 드라마로 태어났다.

◇조폭영화의 공식을 따른 이야기
치성(정재영 분)과 주중(정준호)은 죽마고우다. 둘은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데, 치성이 전라도 조직세계를 주름잡는 왼손잡이 칼잡이라면 주중은 사실 알고 보면 주먹은 그다지 세지 않은 소심한 깡패다.

보스 김영희의 명을 받아 마약 제조업자 최 박사에게 칼을 들이대고 감옥에 간 치성은 그곳에서 수년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또 한명의 죽마고우 순탄(류승용)과 재회한다. 순탄 역시 김영희의 명으로 사람을 죽였다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아직 집행은 이뤄지지 않은 것.

그러던 어느 날 몇 해 전 치성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경쟁 조직의 두목 성봉식이 치성 부모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조직은 세력 확장을 위해 그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급기야 치성에게 등을 돌린다. 10년 간 조직을 위해 충성한 치성은 배신감에 분노하고 순탄을 포함한 감옥 동기들과 함께 탈옥을 모색한다.

"거룩한 계보"는 "친구"의 전라도 버전이다. 그렇게 말해도 핵심을 벗어난 설명은 아니다. 자갈치시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친구" 역시 죽마고우 친구들이 주인공이고 어둡고 비정한 조폭 세계가 주요 소재이기 때문.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 야망과 배신이 어린 시절의 인연이라는 고리와 함께 이어지는 것이 같다. 그런 점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도 닮아 있다. 갱스터 무비, 느와르의 익숙한 구도.

◇장르의 관습을 비튼 상상력과 번득이는 위트
그러나 이 영화는 상상력이라는 무기로 기존 조폭영화와의 다른 길을 걷는다. 갱스터 무비의 땅에 발을 붙인 비장미만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판타지를 영화 곳곳에 펼쳐놓았다. 남성미 진한 영화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달콤한 공상이 웬말. 그러나 장 감독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을 통해 허를 찌르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이라는 허무 개그가 검사와 피의자의 신문과정에서 등장하고, 회개하고 싶다는 사형수의 등에 새겨지는 문신이 순정만화 주인공인 캔디를 연상시키며, "빨갱이"와 "살인마"가 갇힌 교도소 독방에서도 단란한 이야기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상상력의 소산이다.

뿐만 아니다. 교도소의 탈출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결과적으로 이들의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스포일러라 도저히 밝힐 수 없음)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눈을 의심하게 할 만큼 기발하고 황당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황당함이 대책 없는 코미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폭소가 터져나오다가도 그 앞뒤에 놓인 인물들의 절박함과 인물들 사이의 끈끈한 인연이 오버랩되면서 이야기 자체의 쫀득함을 유지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한마디로 영화 속 모든 판타지는 우정의 힘으로 탄생하며 그것은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표현되고 덕분에 관객은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집중력을 잃지 않게 된다.

여기에 장 감독의 장기인 위트가 적재적소에서 효과를 발휘하니, 영화는 과도한 폭력으로 비위를 자극하지 않고서도 장르의 매력을 살리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된다.

◇남성 안에 숨겨진 여성성을 끄집어내다
이 영화의 판타지는 이러한 상황설정 외에도 중요한 부분에서 발휘된다. 바로 정준호가 연기한 주중이라는 캐릭터로 대변되는, 연약하고 정감 어린 남성의 속내가 그것이다. 조폭 세계 실력자의 면모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에, "친구"의 유오성이나 장동건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기에 이 캐릭터는 판타지로까지 느껴진다. 또한 치성과 순탄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우정에서도 역시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향취가 배어난다. 단단하고 투박한 우정이 아니라 결이 고운 우정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여성 관객도 매순간 인물들의 상황과 모습에 푹 빨려들어가게 된다. 감정이입이 자연스럽게 되며 주인공들의 절박함이 마음 한켠을 시종 콕콕 찌른다. 조폭영화의 흔한 비장미에 젖어드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생각이 몰입을 이끈다. 이상한 마력이다.

물론 흠은 있다. 많은 인물들에 고루 비중을 두려다보니 그 과정에서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상황 설명이 종종 허술해진다. 또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인 폭발력은 없다는 점도 아쉽다. 결국엔 뻔한 신파로 흐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이 정도면 한국형 조폭영화의 가슴 뭉클한 진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저기 발전을 모색한 흔적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1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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