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나는 코로나19 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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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나는 코로나19 전사다
  • 병원신문
  • 승인 2021.01.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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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속에서 빛을 내는 인간의 위대함과 강인함 느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그 끝에서 웃으며 만날 수 있길 소망

2018년 12월 우리 병원은 신종감염병 발생 시 가동 예정인 국가지정 음압병상 수준의 병상이 포함된 음압병동을 오픈하였고 다음 해 3주기 인증평가를 치르면서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왔다.

항상 바쁘고 피곤해하는 엄마 때문에 번번이 계획했던 여행은 취소되었고, 불만인 가족들을 다독이며 중3이던 딸이 졸업하는 2월에 가족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여행은커녕 졸업식도, 고등학교 입학식도 하지 못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우한폐렴’이다.

혹시나 국내 전파로 이어질까 하여 감염예방 수칙들이 나오고 연일 매스컴에서는 중국에서 진행되는 전염병의 상황에 대해 중계방송하다시피 하였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코로나19가 중국 내에서 사망자가 천 명이 넘어서고 국내 입국 중국인이 처음 감염자로 뉴스에 나왔던 시기에도 ‘그래 저러다 지나갈 거야’ 했었다.

안연숙 한양대학교병원 음압병동 간호사(계장)
안연숙 한양대학교병원 음압병동 간호사(계장)

지난 2월 중순 대구·경북에서 폭발적으로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병상과 의료진이 부족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도움의 발길이 대구로 모여들었다. 대구·경북은 나의 고향으로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나 역시 한달음에 달려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음압병동 역시 코로나19 중증환자 전담치료 병상으로 지정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되었다. 기존의 격리환자를 옮기고 코로나 확진자 및 의증 환자를 위한 병동으로 전환하는 일이 급하게 이루어졌다. 중증 코로나 환자를 위한 의료행위 시 필요한 물품 및 장비를 대여하거나 구비하여 병실마다 정리하고, 응급상황 시 사용하게 될 약물을 구비하고 인력 배치 등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보호장구가 들어 있는 박스들이 도착하고 확진환자 입원 시 환자와 의료진의 동선을 다시 점검하고 혹시 있을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들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소문을 듣고 가족, 지인, 동료들이 감염을 우려하며 걱정하는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감염이 될까 두려운 것보다 주변인들이 우리를 대하는 시선이 두렵고 불안했다. 음압병동에서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이 학교 혹은 학원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하고 걱정이 되었으며 지방에 계시는 울 엄마 딸 걱정에 잠도 못 주무시고 매일매일 속앓이를 하시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각자의 두려움도 걱정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옅어지리라 위안하며, 이 중차대한 팬더믹 상황에 내가 간호사란 사실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여기며 환자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에 대해 어떤 자료도 없고 축적된 데이터도 없는 상태에서 정부 및 의료계 등 각계에서는 정보를 수집 전달하고 병원은 긴급회의를 통해 나온 사항에 대해 전달하고 전달받은 우리는 공유하며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혼선이 있는 경우 질병관리본부 사이트에 들어가 질의하고 정보를 얻는 일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음압병동 간호사들은 보호장구 착·탈의법에 대해서는 익숙했던 터라 그에 대한 어려움은 크지 않았으나 인공호흡기나 CRRT(지속적 신대체요법,투석) 사용법 등에 대해서는 전무 하였기에 준비하는 짬짬이 유튜브를 보고 공부하며 세팅도 해보았던 기억이 있다.

2월 19일 기존의 환자를 다른 병동으로 분산해 전실 보낸 늦은 오후. 첫 의증 환자 입원으로 시작하여 2월 27일 첫 확진자가 입원하였다. 다행히도 그 당시 서울 확진자는 많지 않았고 입원환자들도 경증이어서 막연했던 두려움이 조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구·경북의 지역 확진자들의 수가 줄지 않고 중증의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지역의 의료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중증환자 병실이 부족하다는 소식과 함께 타 도시 병원으로 이송 하였다는 뉴스가 매일 1면을 장식하였다.

3월 대구·경북지역 중증환자 이송이 결정되었고, 30분 내 환자 도착이라는 연락에 음압병동엔 무거운 기운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름 능숙하게 입었던 보호복도 혹시나 모를 감염에 노출될까 서로 도와가며 착용한 후에도 혹 피부가 노출된 곳이 있거나 찢어진 곳이 없는지 서로 확인하며 기다리던 차, “환자 왔어요~”하는 소리와 함께 레벨D 보호장구를 착용한 다수의 의료진들이 음압텐트를 끌며 도착하였다.

80세 할아버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건강한 분이었는데 가족 모임으로 감염이 되었단다. 폐를 침범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찌나 빠른 속도로 공격을 하였던지 거의 반나절 만에 한쪽 폐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나날이 상태가 악화하여 기도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적용하고 진정치료를 시작하였다. 잠들면 깨어나지 못 할 거라 생각하셨던지 진정약물의 용량을 증량하여도 자다 깨다 반복하고 그러나 한 번 깨어나면 답답한 듯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레벨D에 전동식 호흡보호구(PAPR) 장착을 하면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기에 소리를 지르다시피 해야 대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해야 했다. “좋아지고 있으니 힘 내세요” “잘 견디시면 튜브도 뽑고 집에도 가실 수 있어요~” 라고.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 간호사들은 할아버지에게 힘내시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기를 2주를 넘어 할아버지가 우리의 노력에 보답을 하는 것인지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었다. 삽관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어느 날, “어~~~” “....하~알...” “하~..머..”라고.... 말을 하시는데 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답답하다는 듯 흘겨보시다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이것저것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하다 “할머니요?” 하는 나의 말에 눈을 뜨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 몇 주 동안 가족들이 걱정되었고 특히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한 거라 여겨 전화 연결을 해주기로 하였다. 주보호자인 아들과 통화를 하였고 먼저 할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한 후 할머니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듯 하니 목소리를 들려주면 힘을 내실 듯 하다하니,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준 아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할머니 역시 확진되어 다른 지역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시라고..

아마 확진되어 치료 중이신 할머니의 상태가 깨어나면서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이리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은 “아부지~ 엄마는 괜찮아요. 아부지만 나아지면 되는기라요, 걱정하지 마이소~” “아부지~ 내 목소리 들리지요~” “아부지~ 곧 집에서 다 같이 봐요~” 한다. 아들의 목소리에 그리고 착한 거짓말에 할아버지는 “으~~어~”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눈가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호사이기 전에 부모의 자식이며 자식의 부모인지라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전신이 아려왔다.

가족의 사랑과 응원이 힘이 되셨던지 격리 해지되어 일반병동으로 전실 후 퇴원을 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쾌차하셨는지, 고추밭갈이 걱정하셨는데 올 고추 농사는 무사히 지으셨는지도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일 년 농사일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하는, 인간은 위기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끈을 부여잡고 그 끈을 놓지 않는 위대함과 강인함을 가진 듯했다.

자전거를 타고 풍물시장으로 일을 다니시던 70대 환자. 신장과 심폐기능이 떨어져 인공호흡기와 투석 치료를 하였으나 평소 자전거로 먼 길을 일을 다니실 정도로 건강한 체력을 가지신 터라 힘든 과정을 이기고 훌훌 털고 일어날 줄 모두는 생각했다. 9월 어느 날 나이트 인계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 중앙모니터 상에 늘어져 버린 심장 리듬이 관찰되었고 코드블루 방송과 함께 병실에 들어가 미친 듯 침대에 뛰어올랐고 가슴 압박을 하고 CPR를 하였으나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에 잠길 겨를도 없이 혹시나 모를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방역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상황정리를 해야 했다. 방호복을 벗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온 몸이 젖고 얼굴은 땀범벅에 마스크 눌린 부위는 빨갛게 패였다. 손을 씻는데 갑자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더니 울컥 눈물이 났다. 아들 딸의 사랑하는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죽고 기계적으로 흔적을 지워 내야 하는 이 상황들에 눈물이 났다. 어린 간호사는 벌써 울었는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일하는 내내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볼펜 잡은 손은 떨렸고 고질병이던 손목 통증은 가슴압박 시 무리가 되었던지 한동안 진통제 없이 잠들기 힘들었다.

끝날 것처럼 보이다가도 매번 예기치 못한 확진자가 나올 때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좌절하게 된다. 코로나 확진자가 줄었다가 또다시 수도권에서의 집단감염이 반복되면서 중증 병실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그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질병관리청의 지침이 바뀌었다. 격리해지 기준의 변경으로 퇴원일이 빨라지면서 회전율도 빠르고 중증환자 비율도 늘어났다. 병실 내에서 이루어지는 간호행위가 늘어났고 머무는 시간 역시 길어지면서 업무의 피로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중증환자 대부분 연령대가 높고 거기다 치매나 정신질환을 가진 경우엔 그 업무 강도가 배가된다. 30분~1시간여 소요되는 식사 보조에 개인 위생활동, 대소변 처리, 피부상태 관찰 및 체위변경, 정맥주사를 빼놓는 일은 허다했다.

인공호흡기를 적용한 상태로 폐 환기를 돕기 위해 엎드린 자세로 체위를 변경해야 할 경우엔 간호사 4~5명이 해야 했다. 수시로 콜벨을 누르는 분, 환자의 상태가 궁금해 전화한 그 마음은 백번 이해하나 우리가 코로나를 퍼트린 대상인 것처럼 불평불만을 잔뜩 늘어놓으며 전화를 끊지 않았던 보호자, 택배를 받을 수 없다고 하나 기어이 보내놓고선 빨리 전달해주지 않는다고 수시로 전화하는 보호자에 컴플레인하는 환자에 일하다 말고 1층으로 택배를 찾으러 가는 일, 이제 이런 일은 너무도 잦아서 놀랍지도 않다. 움직임이 가능해 스스로 할 수 있음에도 꼭 호출하여 간호사에게 명령하듯 시키는 분, 바닥에 소변을 보고, 휴지를 바닥 가득 버려 놓거나, 간호사를 꼬집고 신체부위를 만지려 한다던지..

이제는 이런 일들이 익숙해져 버렸다. 간호사에 대한 이런 일부 환자들의 존중 없는 태도는 우리를 더 힘들게 하며 자존감을 떨어지게 한다.

힘내라고 고생한다고 격려를 해주고, 대한민국 곳곳에서 보내주는 응원 메시지에 힘을 내고, 지금도 만나는 분들마다 고생한다고 건네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또다시 힘을 낸다. 간호사라서 다행이다며 힘을 내고 있고, 훗날 역사 속에 코로나를 이겨내는 데 일조한 코로나 전사들 중 한 부분으로 기억될 것이라 상상하며 힘을 내고 있다. 무너진 우리의 일상에 다시 돌아올 평범한 일상을 그리며 우리는 이 또한 끝날 거라고 서로를 토닥이며 버티고 있다.

이 순간도 코로나로 고통받는 많은 분이 건강한 모습으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애쓰는 수많은 의료진의 걸음걸음에 동지애를 느끼며 끝까지 빛날 그들의 역사에 파이팅을 외친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 길 끝자락에 다다랐으며 승전보를 울릴 날도 머지않았다.

우리의 일상을 잠깐만 멈춘다면 너와 나는 치료제가 되며 백신이 될 것이다. 이 길 끝에서 웃으며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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