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A4 한 장의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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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4 한 장의 경륜
  • 병원신문
  • 승인 2012.11.0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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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 (이수태수사학연구소 소장, 전 일산병원 행정부원장)

어떤 난해한 사안도 최종적인 의사결정 데스크에 올라갈 때에는 A4 한 장으로 정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보고서들이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을 이리저리 미시적으로 끌고 다니기만 할 뿐 도무지 그 사안의 실체나 최종적인 모습을 믿음직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직에 잘못된 문화가 자리잡으면 일의 성과가 문서의 분량에 비례하게 된다. 일단 보고서는 두툼해야 성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만약 조직에 그런 잘못된 문화가 만연해 있다면 리더는 "앞으로 모든 보고서는 A4 한 장으로 한정하라."는 지시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런 지시를 해본다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일단 지시가 내려지면 보고서는 A4 한 장이라는 외형은 갖출 것이다. 그 가장 흔한 유형은 아무런 질적 제고 없이 단지 분량만 줄여서 보고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압축을 단순한 분량의 축소로만 생각한 결과이다.

그 다음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매우 거칠고 서투른 단순화가 아닐까 한다. 일종의 커리커쳐화인데 이것은 진정한 압축의 시늉으로 어쩌면 매우 위험한 현상이기도 하다. 충분한 숙고와 고민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 단순화라면 함량미달의 결론일 수가 있고 그렇다면 사안에 대한 경영상 판단을 크게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A4 한 장은 근본적으로 분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A4 한 장은 오랜 경험, 사안에 대한 치밀한 접근, 길고 긴 고민, 그 사안을 둘러싼 제반 여건에 대한 충분한 섭렵, 그리고 빈틈없는 과학적 접근 등이 종합적으로 빚어내는 작품이다. 그것이 가능할 때 모든 것이 저절로 A4 한 장으로 귀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A4 한 장은 작위적인 축소라기보다 오랜 경험과 과단성 있는 판단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성숙된 조직인이 가지는 인식의 원래의 크기라 할 수 있다.

사안을 A4 한 장에 담는다는 것은 그 사안을 원경에서 포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풍경도 원경에 의해 잡히지 않는 풍경은 없다. 그러나 원경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야를 필요로 하고 시야는 보는 사람의 입지, 즉 시점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손쉽게 그 시점을 확보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시점은 그 시점을 확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사람에게만 허용이 되는 것이다. 시점이 갖추어지지 않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사람에게 A4 한 장의 안목을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과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명쾌한 결론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이 소리 저 소리로 이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애초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멀고 넓은 영역을 근시로 포착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근시인 사람에게 넓은 영역을 시야에 담아내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그 넓은 영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러 각도에서 사안을 조명하여 다수의 단편적인 장면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단편적 장면 여럿을 모은다고 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경 하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A4 한 장은 결국 분량이 아니라 경륜이다. 그것을 리더를 포함한 모든 조직원들이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발걸음 하나를 내딛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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