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원은 일제하의 암울한 시기에 백인제(白麟濟, 1899~?)라고 하는 한국 의학계의 걸출한 의사의 집념과 능력으로 척박한 의료현실 속에서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해방과 분단ㆍ전쟁과 개발독재로 이어진 격동의 한국 근대사의 파고를 넘어 2012년 현재 서울ㆍ부산ㆍ상계ㆍ일산ㆍ해운대백병원 등 5개 병원 4천여 병상 규모의 한국 사립병원의 대표적 주자로 성장했다.
백병원의 역사는 단순히 일개 병원의 발전과정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 한국의 사립병원이 어떠한 과정으로 거쳐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말 그대로 '한국 근대 사립병원의 살아있는 역사' 할 수 있다.
이에 본지는 인술제세 인덕제세의 창립 이념을 바탕으로 한 백병원 80년 역사를 백낙환 이사장의 연재를 통해 듣고자 한다.
1. 내 인생의 반석 백인제 박사
나의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는 조선팔도 최고의 외과의사로 친화력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면서 키가 크고 골격이 우람하며 활달한 기상을 지녔다. 우렁찬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1899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에 입학해 3.1운동 발발 직전까지 3년 동안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백인제 박사는 당시 학교 당국의 민족차별과 일부 일본인 교수, 학생들의 오만함,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19년 3월1일 서울 중심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 물론 경의전에서 퇴학도 당했다.
그 후 총독부와 경의전의 유화조치 덕분에 4학년으로 복학했고 이듬해 3월 전 학년 수석의 영광을 안은 채 경의전을 졸업했다. 하지만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결국 2년 동안 총독부의원에서 무보수로 일한 후에야 의사면허(제537호)를 받을 수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1928년 4월 구루병에 관한 연구로 도쿄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3번째로 도쿄제대 의학박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1928년 조선인 최초로 모교인 경의전의 외과 주임교수가 됐는데 이것은 식민지의 청년이 실력 하나로 그 당시 의학계에서 인정받은 대사건이었다.
백인제 박사는 1928년부터 1941년까지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제자인 장기려 박사는 회고담에서 "백인제 선생의 수술에 대한 호평과 일반인들의 신임도는 여간 두터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각종 질환의 감별 진단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확했다. 당시의 대수술은 선생님의 독무대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다. 위장 특히 위궤양, 위암, 간담관, 유암, 갑상선 등의 수술을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백인제 박사는 우리나라 현대의학, 특히 내장외과와 수혈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간 선구자였다.
그는 1937년 상부 장관을 복벽에 유착시켜 장루를 형성해 줌으로써 장관을 감압시켜서 폐색된 부분을 통하게 한 성공사례 7례를 보고했다. 세계 최초로 상부장관의 감압술을 성공시킨 것이다.
수혈분야는 추후에 별도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밖에도 백인제 박사의 학문은 마취로부터 위 및 십이지장외과, 간 및 담도외과,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 등 외과수술 전반에 걸쳐 국내 최초, 최다의 성공사례를 보유했다.이러한 백인제 박사의 학문은 김희규 박사에게 이어졌고 김희규 박사는 해방 이후 미국으로부터 혼합마취기를 도입했으며 복부외과와 담도외과 분야에서 독부적인 업적을 쌓았다.
모두 백인제 박사의 계승한 흔적이라 할 수 있으며 김희규 박사의 뒤를 이은 필자도 역시 복부외과, 식도외과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아 소아에서의 선천성거대결장에 대한 스완슨 수술, 골반내장 전적출술 등을 국내 최초로 시작하기도했다.
이렇듯 백인제 박사는 진단과 수술이 정확해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만주에까지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백인제 박사 앞에 백인제 없고, 백인제 박사뒤에 백인제 없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나돌 정도로 뛰어난 명의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의술을 통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민족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직분을 활용해 후학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백병원을 세웠고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