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쏠림도 심화, 의료자원 효율적 이용 가치 훼손
병원계는 코로나19가 3년여 동안 장기화되고 팬데믹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와중에 대학병원계와 중소병원계의 기대 속에서 제41대 윤동섭 대한병원협회 회장이 추대됐고, 때마침 새 정부도 출범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과도기적 시기이자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된 것이다. 이에 병협은 회무위원회를 구성해 수립된 사업계획을 잘 다듬어 가며 위원회 중심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활성화하기로 결정하고, 5대 중점 과제를 세웠다. 이중 첫 번째 회무목표인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 개선’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봤다.
의료기관은 자신의 기능에 따라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환자는 자신의 상태에 따라 적시에 적정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매년 의료전달체계 개편안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워낙 다양한 이해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9월 의료전달체계 단기대책을 발표한 후 2021년 2월 중장기 개선방향을 공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와 정권교체 등으로 결론 도출이 한없이 지연되고 있다.
단기대책은 의료기관 종별 기능에 맞는 역할을 정립하고, 환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경증환자의 경우 가까운 병·의원에서 신속하고 지속적으로 진료와 관리를 받고, 중증환자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적기에 충분히 치료받도록 보장하는 한편 지역 내에서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여건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또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치료와 연구에 집중하고, 동네의원은 만성질환과 경증관리에 대한 지속적 관리로 역할을 재정립하며, 의료기관 간 의뢰와 회송을 내실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에 따른 단기대책으로는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중증환자 진료는 유리해지고, 경증환자 진료는 불리하도록 수가를 개편하고, 환자의 경우도 적정기관 이용 시 편익이 늘어나도록 비용체계를 합리화하는 안을 제시했다.
또 상급종합병원 평가 기준을 강화해 중증환자 중심의 진료 노력을 유인하고 경증진료에 대한 수가를 인하하는 한편 중증·심층진료 위주의 운영이 가능한 수가체계를 도입하며, 상급종합병원의 명칭도 중증종합병원으로 변경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중장기적으로 의료제공 및 이용체계 적정성에 대한 전반적 검토를 거쳐 의료전달체계 정립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의료기관 종류별 역할을 재정립하고 지역 의료체계 강화 및 지역완결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의료자원 수급관리 계획을 마련, 궁극적으로 상급종합병원이나 서울·수도권 집중화 해소를 꾀한다는 것.
의료전달체계 개편 논의가 지지부진하게 진행 중인 사이 국민의 의료이용 행태는 보장성강화 정책의 영향으로 대형병원으로의 지나친 쏠림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경증환자의 상급종합병원 이용을 억제하는 수가정책과 상종 지정기준 개편 등의 단기대책을 동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는 의료기관 간 역할과 기능이 정립되지 않아 의료시설의 대형화와 고급화, 그리고 의료기관 간 병상과 고가의료장비 보유 경쟁에 따른 비효율, 또 의료자원의 편중으로 인한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 현상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다 각종 평가와 인증, 지정기준 등 새로 도입된 의료정책의 여파로 간호사와 의사 등 의료인력의 수도권 및 대형병원 쏠림 현상 역시 의료자원의 효율적인 이용이라는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전달체계가 현재의 형태로 고착화된 것은 1989년 7월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다. 의료기관을 기능에 따라 1차, 2차, 3차 의료기관으로 규정하지 않고 병상규모에 따라 지정, 진료의뢰서만 지참하면 거주지역과 관계없이 어느 지역의 3차 진료기관을 이용해도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진료권은 유명무실해졌고 진료의뢰서를 통한 의료전달체계는 요식행위로 전락하면서 오늘날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을 자초했다. 더구나 3차 의료기관은 교육과 연구와 같은 고유의 기능보다는 환자 진료에 치중하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하게 됐다.
강희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정책연구실장은 보건복지포럼 2022년 1월호에 기고한 ‘2022년 보건의료 정책 전망과 과제’에서 “정부는 2019년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 시행을 통해 상급종합병원이 중증 환자 위주로 진료하고 경증 환자 진료는 줄이도록 유도하는 평가 및 수가 보상 체계를 개선했지만 보건의료인력의 적정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환자 대비 간호인력과 의사인력 수준 같은 구조적 질 지표를 허가, 인증, 평가 기준에 적용함으로써 의료기관의 의무적 준수를 요구하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강 실장은 이어 “특히 외래 진료에서 종별 기능 분화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상급종합병원에 대한 중증환자 진료 확대를 제외하고는 기타 의료기관의 역할 변화를 규정하기 쉽지 않아 지금까지의 의료전달체계 개선은 상급종합병원의 중증 진료 역할을 강제하고 이에 대한 영향으로 일차의료기관의 역할이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접근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상급종합병원의 외래 요양급여비용은 연평균 9.8%, 외래 내원일수는 연평균 1.23% 증가한 반면 의원은 각각 7.7%, -2%로 큰 격차를 보였다.
따라서 강희정 실장은 변화의 주체를 상급종합병원이 아니라 의원급에 두고 다양한 의료제공 및 지불보상의 융합 혁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성화함으로써 그 영향으로 상급종합병원의 기능 변화를 견인하는 접근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의원급의 일차의료 시범사업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단계화해 변화 역량을 육성할 것과 의원급 의료기관이 위치한 노인만성의료와 장기요양보험을 연계하는 모형개발, 더불어 기존의 커뮤니티케어 사업을 일차의료기관 중심으로 재편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오영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의료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우리나라가 효율적인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환자들의 의료이용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공급 측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다경쟁과 비효율을 해소하기 위해 공급자에 대한 일방적인 규제 정책만 마련할 경우 효율성 증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수요자와 공급자 양면을 모두 고려한 상호보완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책이 추진될 때 자발적인 참여와 지원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영호 연구위원은 지적했다.
정부는 그간 의료단체 및 학회, 시민사회단체 등과 수 차례 협의체를 열고 의료전달체계 개선방향을 모색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도 의료전달체계 개편을 서둘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은 “최근 10년간 서울 및 수도권 소재 상급종합병원의 의료이용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며 “조속한 의료전달체계 개편으로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성주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상급종합병원의 진료비 점유율은 25.8%(7조원)에서 2020년 28.2%(15.5조원)로 10년간 2.4%p 늘었고, 종합병원 역시 같은 기간 23.8%(6.4조원)에서 27.0%(14.9조원)로 3.2%p 증가했다는 것.
반면 의원급 의료기관은 같은 기간 35.5%(9.6조원)에서 30.8%(16.9조원)로 4.8%p 감소했다.
김성주 의원은 “상급종합병원 및 서울·수도권 위주의 의료서비스 제공 및 이용의 집중은 지속가능한 의료체계를 보장할 수 없다”며 “의료전달체계의 조속한 개편을 통해 의료기관 종별 기능과 역할을 시급히 재정립해 의료이용의 비효율성, 진료 왜곡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의료전달체계 연구용역을 맡은 김윤 서울의대 교수는 2020년 7월 29일 정부용역 중간결과 발표에서 의료공급 조절을 통해 의료접근성을 높이고 낭비적 지출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시장에만 맡겨두기보다는 정부가 구체적인 계획과 대안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진료권을 인구 1천명당 상급종합병원 병상수로 구분하고 지역민들의 접근 형태를 반영해 △전국형 △수도권 권역형 △비수도권 권역형 △비수도권 지역형 네 가지 형태로 분류하고, 각각의 형태에 따라 기능을 변경해 상급종합병원 지정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윤 교수는 3차 의료서비스에 대한 적정한 진료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진료권별로 병상이 부족한 곳의 병상을 늘려야 하며, 이를 위해 상급종합병원 수도 60~70여 개 정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내놨다.
이에 대해 중소병원계는 의료전달체계에서 허리역할을 하는 중소병원의 기능 재정립을 통해 균형 있는 지역사회 건강수준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성규 대한중소병원협회장은 지난 5월 기자간담회에서 의료전달체계 개선 없는 보장성강화 정책은 상급종합병원에 환자뿐만 아니라 의료인력의 쏠림현상도 가중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상급종합병원의 중증환자 및 입원 중심 기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중소병원에서 볼 수 있는 환자의 이동은 고비용을 초래하며, 중소병원의 기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종별 기능에 맞는 의료행위를 재정립하고 선택과 집중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최선의 진료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 회장은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의료전달체계 개선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로 일차의료기관과 지방병원에 대한 환자들의 질적 측면 신뢰 부족을 꼽기도 한다. 정부의 의료 정책과 제도 개선 외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정부는 지난 2004년부터 의료전달체계를 포함한 의료인력 수급 대책, 기능별 적정 보상체계, 시설·인력 기준 등을 담은 보건의료발전종합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난해 상반기 예정을 넘겨 하반기에도 마무리하지 못했고, 해를 넘겨 2022년 하반기에 접어든 2022년 7월 현재까지도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의료전달체계와 관련된 그간의 무수한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의 한 가운데 놓여있는 것은 정부 주도의 제도 개편 혹은 규제 강화 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공급자와 수요자가 동시에 수용하고 현실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