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법조계, 시민·환자단체 등 원점검토 주장 한 목소리
체계정당성·포괄위임입법금지·직업수행 자유 모두 문제
“이 법은 종이로 하던 것을 전자적으로 하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종이로 했던 것은 문제가 안 되고 전자로 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골자로 한 ‘보험업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일부 국회의원과 민간보험사가 입 밖으로 흔하게 내뱉는 발언 중 하나다.
이를 두고 의료계, 법조계, 환자단체, 시민단체, IT업계 모두 한목소리로 해당 발언은 ‘조삼모사’식 표현에 불과하다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체계정당성도 없고, 포괄위임입법금지원칙은 지키지도 않았으며, 직업수행의 자유까지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의 문제점과 개선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 원점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대한의사협회와 바른실손국민포럼은 7월 7일 의협회관 지하 1층 대강당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바람직한 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의료계, “의료법 중심 법체계 무시…여러 문제점 간과”
우선, 대한병원협회와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 곳곳이 ‘과잉잉법’투성이인데, ‘종이’가 ‘전자’로 대체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서인석 병협 보험이사는 이번 개정안의 경우 개별 환자에게 미칠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보험사의 편익만을 지나치게 배려한 법이라며, 국민을 대신해 행정업무를 해야 하는 금융위원회가 보험사의 전자화된 의료정보 취득의 잠재적 위험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표했다.
서인석 보험이사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문제는 기존 서류를 전자화해 전송하면 영리기업인 민간보험사가 환자 개개인의 정보를 ‘디지털 프로파일링(digital profiling)’해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며 “보험사들이 실손보험 청구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진료비세부내역서에는 환자의 민감한 정보가 나열돼 있다”고 지적했다.
즉, 다수의 보험사는 그간 인건비 등의 문제로 진료비세부내역서의 전자적 전환을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번 개정안을 통해 진료비세부내역서가 전자 형태의 기본서류가 되면 의료행위, 약제, 치료재료 등이 환자 개개인 단위로 관리돼 결국 고액 진료비 청구 건의 지급 거절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서 이사는 “사적 계약에 따른 요양기관에 환자의 민감한 의료정보를 전자적으로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의료인에게 법적 안전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직업수행의 자유마저 침해하는 일”이라며 “일부 요양기관은 이미 환자의 정보침해를 최소화하는 범위 안에서 의료법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없이 자율적으로 전송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모든 요양기관에 강제화하는 것은 보험업계의 편의만 생각하겠다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안 그래도 높은 실손보험 손해율에 허덕인다면서 소액의 실손보험을 청구하지 않는 환자를 위해 요양기관에 청구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조삼모사와 다름없다”며 “매년 미청구된 실손보험 금액이 약 2,500억 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같은 낙전수입까지 보험사가 감수한다면 결국 보험료 폭등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고 부언했다.
최청희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겸 보험이사는 이번 개정안이 의료법 중심의 법체계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의료법 제21조 제2항에 따르면 의료인 등은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환자에 관한 기록을 열람하게 하거나 사본을 내어줘서는 안 된다.
다만, 같은 조 제3항에서 구체적인 개별법을 열거하며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현행법상 환자에 관한 기록의 제3자 열람 및 사본 제공에 관한 규범은 의료법을 중심으로 규정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
최청희 이사는 “개정안에 따르면 제21조 제3항은 그대로 유지한 채 보험업법에 ‘의료법 제21조에도 불구하고’라는 문구만을 넣는 방식으로 예외를 허용해 의료법과의 충돌을 야기하고 있다”며 “향후 개별법에서 또 다른 예외규정 신설의 선례가 될 우려가 크고, 규범의 내용과 근거가 모순되면 안 된다는 의미의 ‘체계정당성’의 원리를 어기고 있으니 제3자 열람 및 사본 교부를 하고 싶다면 의료법 제21조 제3항 각호에 개정안 관련 규정을 추가·신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법 외에도 개인정보 등 전송요구권에 관한 개인정보보호법 및 신용정보법 관련 규정의 체계정당성에 반하는 문제도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전송의무자인 요양기관은 보험사의 선택에 따라 보험사 또는 대통령령이 지정하는 전송대행기관을 통하도록 강제화돼 있어 요양기관의 선택권이 없다.
최청희 이사는 “당국의 개입을 배제하고 다수의 전송대행기관을 구성·운영함과 동시에 요양기관이 자율적으로 구체적인 전송 방법 및 전송대행기관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며 “피보험자의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전송하는 시스템을 구축·운영·이용함에 있어 소요되는 일체의 행정비용 부담의 주체는 요양기관이 아닌 보험회사로 명확히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번 개정안에서 ‘구성을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로 규정한 위원회의 구성·권한·자격 및 전송대행기관의 제재수단 등 포괄위임입법금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도 큰 문제라는 게 최 이사의 설명이다.
포괄위임입법금지 원칙은 국회에서 법을 만든 이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위임할 때 어느 정도의 골격을 정한 후에 맡겨야지 모든 것을 결정하라는 식으로 떠넘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위 법규와 규칙이 오히려 법을 위반해 주객이 전도되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최 이사는 “위원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그 구성·권한·자격 등에 관해 대통령령에서 정할 사항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법률에 직접 규정을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며 “게다가 전송대행기관에 대한 관리·감독의 근거나 법령 위반 제재수단의 근거도 규정돼있지 않는 등 포괄위임입법금지 원칙을 과도하게 위반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특히 보험사는 자꾸만 청구절차가 불편해서 국민의 편의성을 제고하기 위해 개정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미 10여 년간 개정안 없이도 민간 핀테크 및 인슈어테크 기업들의 노력으로 충분히 제고됐다고 강조한 최 이사다.
그는 “민간 핀테크 기업 등이 이미 잘 하고 있다면,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게 고도화의 여건을 만들어주고 잘못할 경우를 대비해 페널티 정책을 수립해야지, 뜬금없이 보험개발원을 둬야 한다는 것 등은 논리적으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납득하기 힘들다”며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번 개정안이 ‘과잉입법’은 아닌지 원점으로 돌아가 당위성 및 체계·형식 등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부언했다.
법조계, “사보험인 실손보험의 정의부터 다시 고민해야”
IT업계, “청구 간소화 시장 이미 있다…정착 노력할 시기”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법조계와 IT업계 관계자들도 의료계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사보험인 실손보험의 정의부터 다시 고민해야 할 정도로 신중하게 접근할 문제인 데다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시장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것.
정혜승 변호사(법무법인 반우)는 “실손보험 청구 자료 전송 요청자가 보험계약자, 피보험자, 대리인 등이라고 돼 있는데 보험계약자가 가족이 아닐 수 있다”며 “의료법에서는 환자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기록을 전송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큰 문제가 없는데, 보험업법 개정안을 보면 환자 동의서도 필요 없이 전송요구자의 진위 여부를 어떻게 확인해 환자 민감 정보 유출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반문했다.
정 변호사는 또한 “실손보험은 사보험이고, 사보험은 기업이 자신의 이익에 맞춰 만든 상품이기에 이 점에 기초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며 “보헙업법은 환자 건강권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청구 즉, 재산권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만큼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진옥 의료IT산업협의회 회장(비트컴퓨터 대표)은 “민간 영역에서 합법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청구 간소화 사업을 하고 있고 이미 시장은 형성돼 있다”며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 권고 이후 핀테크 업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디지털 생태계가 생겨났고, 올해 하반기에는 전국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서비스가 확대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IT업체 H사는 2019년 8월 설립 후 3년 동안 플랫폼 개발을 통해 실손보험 간소화 서비스를 개시했고 현재 네이버페이 및 카카오페이와 함께 4,500여 개의 의료기관에 시스템을 구축하고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전진옥 회장은 “2025년까지 전체 의료기관의 90% 이상이 핀테크 업체의 실손보험 청구시스템과 연동될 전망”이라며 “이제는 각각의 분야가 청구 간소화의 확산 및 정착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전 회장은 이어 “보험업계는 실손보험 청구 양식 표준화에 집중하고, 핀테크 업체와 의료정보 업체는 청구 연동 표준 API 개발 등 청구시스템의 고도화 및 운영에 힘을 쏟을 수 있도록 하는 환경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시민·환자, “그 어떤 국민과 환자도 찬성한 적 없다”
실손보험의 가입자인 시민과 환자단체는 그 누구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적 없다며 국회와 정부는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듣고 보험업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지 되물었다.
안상호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사는 “보험업계는 청구 과정의 불편함을 해소해 환자 피해를 막겠다는 이유로 집요하게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주장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지급 거절도 모자라 반화 소송까지 불사하는 반인권적인 행태를 보여왔다”며 “영리기업인 보험사가 민감한 환자의 전자적 의료정보를 악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고양이가 생선을 앞에 두고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코웃음을 쳤다.
조희흔 참여연대 간사도 “진료비세부내역이 없어도 청구 간소화를 할 수 있는 데다가 소액을 청구하지 않는 이유는 진짜 적은 금액이기 때문이지 번거로워서가 아니다”며 “오히려 전 국민 건강보험 제도를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보험업법 개정안의 졸속 처리를 강력히 반대한다”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