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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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정윤식 기자
  • 승인 2022.12.14 0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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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식 병원신문 기자.
정윤식 병원신문 기자.

개인적인 얘기로 시작하려고 한다.

약 두 달 전 필자는 첫 아이를 품에 안은 축복을 경험했다.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아이가 탄생해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책임감, 기쁨, 안도감, 걱정 등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처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많은 질병과 부상, 응급상황을 겪을 것이고 심지어 희귀질환을 앓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때마다 아픈 아이를 등에 업고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녀도 입원할 곳이 없고 심지어 소아청소년과 의사도 만날 수가 없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고, 평생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수도권의 대표적인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길병원이 최근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중단한다는 공지를 홈페이지에 게재했고, 가천대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의료진은 장문의 편지를 인근 의료기관에 보냈다.

그의 편지 문장 한마디 한마디에는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중단하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단순히 한 병원의 고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더 큰 폭풍이 몰아닥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다.

소아청소년과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됐다.

초저출산, 신생아 급감, 낮은 수가, 진료비 통제, 코로나19 팬데믹, 의료사고 책임 등등 무엇하나 긍정적인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책은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건강보험 개혁을 통해 필수의료 투자를 늘리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마저도 인력수급 및 수가 현실화 등 근본적인 대안이 빠진 단기계획이어서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소아청소년과 전반에 숨을 불어넣는 대책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가천대길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 중단은 여러 의미로 심각함을 넘어 참담함을 내포하고 있다.

저출산의 여파로 인해 소아청소년과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조차 못 버틴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올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16%대에 머물렀는데, 이를 극복할 방법이 전무하고 요원하다.

만에 하나 방안을 마련한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소아청소년과에 숨을 불어 넣을 수 있어도 소아청소년과 자체가 정상화되려면 몇 년이 소요될지 아무도 모른다.

즉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다음 달이, 다음 달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몇 년 후가 더 암울하다는 의미다.

정부는 이번 가천대길병원 사례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인지하고 소아청소년과를 비롯해 수년간 전공의 수급조차 힘든 진료과들을 다시 돌아보는 등 얼마 전 발표한 필수의료 대책 외에 추가적인 대책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

수년간 저출산 극복에 천문학적인 재원이 투입되고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 기피과 극복을 저출산 극복 정책과 함께 한 세트로 고민하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부모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도 조성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현재 소위 인기 진료과라 불리는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정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등도 미래가 서서히 없어지는 것 아닐까.

소아청소년과에서 시작된 의료붕괴가 점차 모든 진료과로 잠식해 들어가지 말란 법 없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겠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길병원이 소아청소년과 입원 진료를 중단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앞으로 우리가 의료계에서 상상하고 걱정하는 일 모두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두 달여 전 세상의 빛을 본 소중한 내 아이가 아플 때 진료받을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없어서, 입원시킬 소아청소년과 병실이 없어서 길거리에 주저앉아 절망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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