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중소병원 경영현실과 의료정책
백성길 경기도병원회장
2005-01-06 윤종원
세계경제의 불안정성 심화와 내수경기의 지속적 침체를 겪고 있는 위기의 한국경제를 바라보며 새해 벽두의 희망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비단 필자뿐 만은 아닐 것이다.
20여년 가까이 수 없이 많은 병든 사람을 진료하며, 환자와 고통을 함께하는 봉직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왔을 뿐 아니라, 지난 십 수 년 간 중소병원을 경영하면서 보건의료인으로서 나름대로의 책임과 소명의식을 무던히도 강조해왔지만, 요즘의 병원 현실을 돌아보면서는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성시 해왔던 의료직을 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칸트는 행복의 원칙으로 ‘어떤 일을 할 것,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기의 한국사회에서, 젊은 대학생들은 대학문을 나오자마자 청년 실업자 군으로 전락하고, 실업은 이미 80만명을 넘어, 사람들은 삶의 무게로 말미암아 반목과 질시에 몰두하고, 희망을 설계하기보다는 낙담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내수경기의 지속적 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트랜드는 대형화 추세로도 대표될 수 있다. 대형할인마트와 유통시장에 외국 자본과 국내 대기업이 본격 진출하면서 경쟁력을 잃어버린 재래시장의 모든 점포들은 문을 닫게 되는 처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나마 돈이 된다는 신종업종에는 모두 몰려가 과다 출혈경쟁을 발생 시키고, 이 내 망하고 마는 악순환의 고리가 우리의 사회경제를 멍들어가게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병원업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있는 최근의 화두는 단연 ‘대형병원의 몸집불리기’와 이에 따른 ‘병원산업의 빅뱅’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미 발표된 내용만 보더라도 서울 수도권 지역에 올해 개원을 목표로 신축중인 6~7개 의료기관의 총 병상수가 4000개를 넘어서고 있다.
현재 추진 중인 각 병원별 신증축 규모를 보면 중앙대 의료원 800병상, 연세의료원이 1000병상 이상의 새 병원을 개원하고 영동세브란스에 200병상급 별관을 신축하며, 건국대 의료원이 800병상 신축, 경희의료원 800병상의 고덕병원 신축, 동국대가 800 병상급의 일산의 불교병원을 개원할 예정이다.
더군다나 삼성의료원, 현대아산, 가톨릭의료원, 서울대학병원 등 대형병원도 앞 다투어 대규모 신증축을 현실화하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대형 병원의 경쟁적 병상증설이 ‘병원산업의 빅뱅’으로 현실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신증축 러시는 WTO DDA 의료시장 개방과 경제특구내의 외국영리의료법인 진출 등 새로운 경쟁에 대비한다는 측면과 적체된 대기환자의 해소, 새로운 의료시스템의 도입, 노후화된 시설의 교체 등 여러 가지 사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이유야 어떠하든 이로 말미암아 파급될 중소병원의 환자 감소, 의료 인력난의 심화와 인건비 상승 등이 중소병원의 경영위기를 심각하게 진전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어 중소병원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경쟁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3차 의료기관의 대규모 병원 신증축은 중소병원을 벼랑 끝까지 내몰게 될 것
사실 의약분업 이후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은 종별 간 역할과 기능이 정립되지 못함으로 인해 의료기관간 협력보다는 경쟁관계에 놓여있다.
의약분업 시행 시 1차 동네의원과 2차 중소병원 간 본인부담금 격차로 인해 의원급 개원러시가 이뤄졌고, 미미한 의료기관 종별 가산 율 격차로 말미암아 1차 의료기관의 입원실 급증이 발생했다.
1차 의료기관은 질환관리 및 질병치료, 예방 등 건강증진에 주력하며, 입원치료는 1차가 아닌 2차 의료기관(병원)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기능이 정립되지 않음으로써 결국 위상이 모호한 상태에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소병원은 현재 60%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실 가동 율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종합병원을 선호하는 국민의식이 뿌리 박혀 있음으로 환자들은 의원이나 중소병원보다는 대규모 종합병원에 집중되고 있다. 때문에 중소병원은 1차 동네의원과 3차 대형병원 사이에 끼어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의료전달체계는 그 기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3차 의료기관의 대규모 병원 신증축은 애써 양산한 중소병원의 보건의료 인력의 이동을 촉발시킬 수밖에 없으며, 중소병원은 환자의 진료를 위한 의사의 채용과 보건의료 인력의 확보에 비상이 걸릴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근무여건, 급여수준, 의료수준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3차 의료기관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중소병원의 의료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키게 되고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져 중소병원의 경쟁력을 또다시 하락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보건의료당국이 아무런 대책방안을 강구하지 않은 채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당국은 병원의 신증축과 관련한 인허가 업무가 지방자치단체로 이관됨에 따라 이에 대해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소관사항이 아니라며 발을 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방자치단체(시도)는 재정수입 증대를 위해 과다병상 문제와는 상관없이 행정적인 문제가 없으면 신증축을 허가 하거나 오히려 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중소병원의 도산으로 의료공급체계가 사실상 붕괴되고 이로 인해 의료서비스의 심각한 불균형이 현실화되면 그때 가서나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파악조차 되어있지 않은 국가차원의 적정 병상 수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이 이뤄져야 하며, 이를 토대로 각 시도와의 협의를 통해 장기적으로 병상을 관리 조절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는 무차별적인 수도권 대형병원의 신증축이 파생할 급성기 병상의 과잉으로 인한 병상 이용 율 하락, 의료비 증가, 과도한 경쟁과 중소병원의 도산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중소병원의 생존과 지역 의료서비스의 균형적 발전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별도의 지원육성법 제정을 추진해야
이미 중소병원의 자구책은 한계에 봉착해 있다. 매년 인건비 상승, 건물 및 시설의 감가상각, 신규의료장비의 도입 등 경영여건을 감안해 경비절감을 외쳐대고 인력을 줄이고, 아웃소싱 비정규직 확대 등 여러 가지 방책을 모색해 왔지만 현실성 있는 대안이 되질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올해의 의료수가는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2.99%만이 인상 되었으며, MRI가 비 급여에서 보험급여로 전환되었다.
올해는 300인 이상 상시고용 병원에 주40시간 근로시간 단축(주5일 근무제)이 실시될 예정이며 이를 두고 지난해와 같은 산별교섭이 주요 이슈가 될 것이다. 또한 내수경기의 지속적 침체로 서민중심의 중소병원은 환자의 감소가 불가피할 것이다. 정말 어느 것 하나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중소병원을 파국으로 몰아넣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의 병원이용에 대한 접근성과 편리를 증대시키며 국가의료체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공익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대책의 마련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의료법상 의료법인 병원은 비영리법인인 반면 세제혜택은 없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병원산업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한 시설설비와 고가의 의료장비 등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되는데 반하여 투자회수율은 극히 낮은 상태에 있다.
또한 다양한 직종의 고용창출효과가 높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특수성을 고려하여 중소병원에 대한 재정지원 및 시설 장비 지원, 중소기업계정과 같은 기금을 통한 융자, 세제 감면, 규제완화 조치 등 중소병원의 생존과 지역 의료서비스의 균형적 발전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별도의 중소병원 지원육성법 제정이 시급히 필요하다.
▲투입원가에 비교한 합리적 범위에서 보상가능한 수가체계로의 변환이 필요
지난해 말 2005년도 건강보험료 및 건강보험수가의 조정과 보험급여 범위 등을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논란을 겪은 끝에 1조 5천억원의 보험급여 확대, 보험료 2.38%, 환산지수 2.99%의 인상과 의원급 초진료와 재진료 각 2% 인상을 결정한바 있다.
그러나 2.99%의 수가인상은 내외적 인건비 상승요인(4.9%), 소비자물가상승률(3.6%), 감가상각비, 주5일제에 따른 비용 상승 등 중소병원이 처한 현실과 비교해볼 때 턱없이 낮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적자발생 요인들이 반영되지 않은 결과일 따름이다.
현행 의료수가체계는 투입자원 기준 상대가치 점수에 의거한 의사 행위료와 의료기관 종별 가산율로 집약된다. 의료수가는 병원의 특성(자본, 기술, 인력 집약성)을 고려하여 병원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생비용에 근거해 보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하게 과소 책정됨으로써 병원의 경영수지를 악화시키는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 때문에 투입원가에 비교한 합리적 범위에서 보상가능한 수가체계로의 변환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의사 행위료와 병원수가로 구분되어야 한다.
▲국가의료체계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의료개선대책의 마련에 정부당국, 보건의료인, 국민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국가의료체계의 발전은 어느 일방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각자가 맡은 영역을 충실히 하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조할 때 발전은 가능하다. 이러한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