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결산] 의대증원 블랙홀에 갇힌 '갑진년' 국회
2024년 갑진년, 병원계는 기나긴 코로나19 팬데믹 터널에서 벗어나 모처럼 청룡의 해에 용처럼 승천하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정부의 미숙한 의대정원 확대 발표로 코로나19보다 더 힘든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국회 역시 지난 4월 총선을 통해 역대 가장 많은 의료인이 국회의원에 당선, 커다란 꿈을 안고 22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의대증원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블랙홀에 갇혀 보건의료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정책 추진보다는 여야 간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이에 병원신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했던 2024년 국회를 의대증원을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의대증원 발표로 의료대란 시작…여야 ‘네 탓’ 공방만
지난 2월 6일 보건복지부가 의대정원 2,000명 증원 방안을 발표하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의료를 정치도구로 활용하고 총선을 앞두고 의대 입시 만능주의 포퓰리즘 정책을 설 명절 밥상에 올려, 이슈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당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통령실이 의대정원 확대를 조기에 발표하고 이를 통해 이슈 전환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2월 7일 당시 21대 국회의원이었던 민주당 신현영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의대정원 증원 방안이 정부의 선심성 정책”이라며 “윤석열 정부가 ‘부실의대·부실의사’를 양산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정치쇼라고 일갈했다.
이 대표는 “의사수를 늘리는 일은 단순히 덧셈하는 산수 문제가 아니다. 정원확대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그것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타협·협의·조정해야 되는 국정과제로 고차방정식”이라며 “공공의료·필수의료·지역의료 확충을 위해 정원 확대가 필요하나 그 내용 역시도 공공의대 설립, 지역의대설립, 지역의사제 도입 같은 중요한 콘텐츠들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의사단체들의 집단파업을 ‘밥그릇 지키기’라며 과격 집단행동을 막는 데 치중했다.
당시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사단체들은 파업을 무기 삼아 빈번히 정원 확대 논의를 무산시켜 왔다”며 “의대정원 확대 반대가 의사 모두의 뜻은 아니고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인질로 잡은 채 과격 집단행동을 주장하는 일부 의사단체 집행부의 문제가 크다”고 말했다.
여기에 한덕수 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의대정원 확대를 둘러싼 의료계 파업에 대해 “의료계가 비토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해 의료계를 더욱 자극하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한 총리는 “우리 의대가 40개로 2,000명이면 한 대학에 50명이 더 늘어나는 것”이라며 “평균 50명을 늘리는 정도로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역시 전공의 등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두고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의료계로부터 공분을 샀다.
결과적으로 의료계의 집단행동을 두고 국회가 중재자의 역할은 실종된 채 ‘네 탓’ 공방만 이어가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병원들의 차지가 돼 버렸다.
또 국민의힘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제안한 4자협의체 구성과 의대정원 규모 대폭 축소 주장이 사실상 의료파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 비판했고 민주당도 정부를 향해 강경 일변도로 의료계를 몰아붙이는 무책임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의정갈등 속에 시작된 22대 국회, 간호법 제정으로 간호계 반사이익
의대정원 확대로 인한 의정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21대 국회가 5월 29일 막을 내리고 새롭게 구성된 22대 국회가 시작됐다.
이에 따라 21대 국회서 발의됐던 보건의료 관련 주요 법안들이 자동 폐기됐지만 간호법 제정안, 공공의대 설립법, 지역의사양성법 등이 22대 국회서 다시 발의됐다.
특히 의정갈등으로 인해 21대 국회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간호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돼 의대정원 확대로 인한 혼란을 틈타 간호계만 반사이익을 얻는 상황이 벌어졌다.
간호법안은 앞서 21대 국회서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 요구로 한 차례 폐기됐었다.
의대정원 확대로 인한 전공의들의 단체 사직이 간호법 재추진의 원동력이 돼 간호법 저지를 위한 의료계의 노력이 허사가 돼 버린 꼴이다.
국민의힘은 총선을 코앞에 뒀던 지난 3월 28일 당시 유의동 정책위의장이 간호사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부와 국민의힘이 전공의가 의료 현장을 이탈하면서 PA 간호사 시범사업을 통해 실제 이들의 업무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고 밝혀 의정갈등에 따른 의료현장의 부족한 의사인력을 대거 PA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조원준 더불어민주당 수석전문위원은 민주당은 환영한다면서도 선거를 앞두고 등 돌렸던 간호계의 환심을 사서 표를 얻고자 하는 얄팍한 선거전략의 일환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이후 간호법 제정은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지난 8월 27일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1시간 10분 만에 간호법 심사를 마쳤으며 다음날인 28일 오전 복지위 전체회의를 열어 간호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강선우 간사는 “지금의 의료대란은 명백한 윤석열 정부의 정책 실패”라며 “자신들의 정책실패로 의료현장을 도미노처럼 붕괴에 빠뜨렸고 결국 국민의 생명과 건강마저 위험에 처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와 여당이 뒷북 수습을 위해 부랴부랴 자기부정과 자기배신을 거듭하며 간호법 처리에 나섰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의료공백 해소를 위한 절박함이라고 이해를 구했다.
국민의힘 김미애 간사는 “대통령의 재의요구 사유는 21대 국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공백 상황에서도 묵묵히 현장을 지키면서 헌신하고 간호사분들이 법적 보호를 받으며 안심하고 진료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호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간호법안은 8월 28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일부 자구 수정을 거쳐 이날 본회의에 회부·가결됐다.
다만 간호법안 반대표를 던진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은 간호법안이 ‘간호사 깍두기법’이라고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주영 의원은 “간호법안은 간호사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간호 영역의 독자성을 무너뜨리고 전문성을 폄훼하는 ‘간호사 깍두기법’이자 현장 간호사, 특히 신규 혹은 저년차 간호사일수록 위험과 착취에 노출시키는 ‘간호사 상시 동원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한편 지난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의사 출신 9명과 약사 1명, 간호사 2명 등 총 12명의 보건의료인들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의사 출신은 국민의힘에서 △안철수 의원(경기 성남 분당갑) △서명옥 의원(서울 강남구갑) △인요한(비례대표) △한지아 의원(비례대표), 더불어민주당은 △전현희 의원(서울 중·성동갑) △차지호 의원(경기 오산) △김윤(비례대표)과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비례대표),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비례대표)이 있다.
또 약사로는 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경기 부천시갑), 간호사는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성남 중원)과 진보당 전종덕 의원(비례대표) 등이다.
이 가운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으로 서명옥·한지아·김윤·김선민·이주영·서영석·이수진 의원이 활동 중이다.
한동훈 제안 ‘여야의정협의체’ 20일 만에 끝
대통령 탄핵으로 정부 의료개혁 동력 잃어지리멸렬하게 지속되고 있는 의정갈등은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지난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 발동으로 국회에서 탄핵돼 정부의 의료개혁 역시 그 동력을 잃어 버린 모양새다.
지난 10월 22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의료대란이 도마에 올랐지만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력하고 있다’, ‘소통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해 야당 의원들로부터 질타가 쏟아졌다.
의료대란 책임을 묻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에 조규홍 장관은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정부의 의료개혁이 지연된 것도 있고 전공의들의 현장 이탈로 촉발된 측면이 있다”며 의료계와 정부 모두 책임이라고 답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은 장관과 박민수 제2차관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 의료대란 사태의 가장 핵심인 2025년도 의대 입학정원에 대해서도 유연한 변화를 주문했지만 조규홍 장관은 “2025년도 정원 논의는 할 수 있으나 변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특히 의료사태 해결을 위해 지난 11월 11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대한의사협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핵심 단체들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인 국민의힘과 대한의학회,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한덕수 국무총리,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참여하는 여야의정협의체가 출범했지만 3주도 채 안 된 20일 만에 사실상 중단됐다.
정부와 여당이 대한의학회와 KAMC의 2025년도 의대정원 재논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다는 기존 입장을 견지하면서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 없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 여당은 ‘당분간 휴지기’라고 표현했지만 의학회와 KAMC는 ‘중단’이라고 받아치면서 아무런 소득 없이 사실상 끝이 난 것.
이와 관련해 의학회와 KAMC는 공동 성명을 통해 “정부와 여당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만큼 더 이상의 협의는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인해 그동안 정부의 ‘의료개혁특위’에 참여해 온 대한병원협회가 특위 탈퇴를 선언함에 따라 정부의 의료개혁도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대한병원협회는 입장문을 통해 “이번 계엄사령부 포고령 5조의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가 사실을 왜곡하였을 뿐 아니라 전공의를 마치 반 국가세력으로 몰아 ‘처단’하겠다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면서 “이는 국민건강만을 위해 살아온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인들의 명예와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정부의 왜곡된 시각과 폭력적 행태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며,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존중받고 합리적 논의가 가능해질 때까지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참여를 중단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