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보험사 건보자료 제공 요청 6건 '거절'…이유는?
연구계획 과학적 연구 기준 미충족…연구결과 공개 및 검증 절차도 결여
국민건강보험공단(이사장 김용익)은 최근 5개 민간보험사가 요청한 건강보험자료 6건을 심의한 결과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9월 14일 발표했다.
이 같은 결정에 5개 민간보험사가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건보공단은 이례적으로 미승인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이번 심의는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심의위원회를 통해 이뤄졌다.
위원회는 국민건강정보자료 제공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건보공단 내·외부 전문가 14인(시민단체, 의료계, 유관공공기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의사결정기구다.
위원회는 지난 7월 민간보험사의 자료요청이 접수된 이후 위원회 3회, 청문 2회 외에도 수차례의 회의를 진행했으며 모든 사안에 대해 심의위원 전원의 논의를 거쳤다.
심의위원들은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에 관한 규정’에 기반해 민간보험사의 연구계획서를 검토했으며, 세 가지 원칙을 두고 심층적으로 판단했다.
세 가지 원칙은 △정보 주체인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가 △과학적 연구 기준에 부합하는가 △자료제공 최소화의 원칙에 적합한가 등이다.
연구계획이 정보 주체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가?
건보공단에 따르면 민간보험사에서 자료 요청한 6건의 연구목적은 계층별 위험률 산출을 통한 보험상품 개발에 있다.
다만 계층 선별의 목적이 정보 주체인 국민을 배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국민을 포괄하기 위한 것인지, 심의위원들의 입장이 갈렸다.
이에 민간보험사는 청문을 통해 취약계층, 임산부, 희귀질환자, 고령 유병자 등에 대한 보장확대를 위해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 토론에서도 이견은 팽팽하게 대립해 합의된 결론에 도출하지 못했다.
연구계획이 과학적 연구 기준에 부합하는가?
심의위원들은 지난 8년여 동안 수천 건의 연구계획서를 검토하면서 건강보험 자료분석을 위한 과학적 연구의 최소기준을 적용해 왔다.
즉, 선행연구 검토를 통해 고유한 문제를 정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명확한 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 것이다.
이는 변수의 개수와 정의를 적절하게 구성하고 데이터 특성에 맞는 통계기법과 연구결과에 대한 객관적 검증 절차 등이 제시돼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심의위원회는 자료제공 심의가 시작된 2014년부터 올해 8월까지 총 6606건의 연구계획서를 심의했으며, 심의한 연구계획서 대부분이 대학과 의료기관 등에서 기존 논문형식에 맞춰 작성돼 대상자 규모나 약제 정보 제한 등 세부적인 쟁점 외에는 큰 문제 없이 승인한 바 있다(미승인 306건).
하지만 이번 민간보험사에서 요청한 연구계획서는 선행연구 검토나 연구가설이 제시되지 않았고, 환자를 주상병만으로 정의했으며 단순 발생률 및 유병률(조율, crude rate) 산출만을 기술하고 있었다.
아울러 연구결과가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계획에 따른 결과가 과학적 검증을 거친 후 활용돼야 결과의 오용을 방지할 수 있음에도 청문 과정에서 민간보험사는 학술지 투고와 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peer review) 절차 수행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결국, 심의위원들은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산출한 값을 객관적인 검증 절차 없이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상품개발에 곧바로 사용한다면 연구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시 말해 심의위원회는 민간보험사의 연구계획서가 과학적 연구 기준에 미흡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건보공단은 “제약회사와 보험사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연구의 경우 회사 단독으로 연구진을 구성하기보다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학계나 공공연구소 연구진과의 협업을 권고한다”고 말했다.
자료제공 최소화의 원칙에 적합한가?
자료제공 최소화 원칙이란 목적에 맞게 익명정보, 가명정보, 실명정보 등 각 정보의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신중하게 판단해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익명 정보로 해결할 수 있는 연구에 가명정보를 제공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번 민간보험사가 요청한 국민건강정보는 가명정보이므로 심의위원들은 원칙에 따라 연구계획서가 익명정보로 결과도출이 가능한지 검토했다.
그 결과, 계층별 단순 질병발생률 및 유병률 정도의 연구 설계로는 연구용 데이터베이스보다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계층별 단순 발생률 및 유병률 정보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건보공단으로부터 민간보험사에 제공되고 있던 것을 확인했다.
전체 상병 대분류별 통계, 심뇌혈관질환 및 암 등 주요 중증질환뿐만 아니라 난청, 온열질환, 백내장 등 단일질환 통계까지 성별과 연령별(1세 단위 포함)로 이미 제공하고 있고 일부 수술‧처치 관련 통계도 있다.
심의위원회는 이처럼 접수된 6건의 목적이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충분히 달성 가능하기 때문에 가명 처리된 연구용 데이터베이스 제공은 적합하지 않으며 이번 자료요청은 그간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건별로 받아온 익명집계표를 한꺼번에 산출하겠다는 목적에 가깝다고 봤다.
공공데이터를 상품개발에 활용하려면 절차적 투명성 갖춰라
결론적으로 심의위원회는 민간보험사가 요청한 6건의 연구계획을 미승인했고 건보공단, 민간보험사, 시민사회에 당부하는 보충의견을 제시했다.
심의위원회는 “건보공단은 모든 정보제공의 원칙과 절차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범국민적 거버넌스 구조를 구성해야 한다”며 “여기에는 국민을 대표하는 가입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정보 활용 및 연구 전문가 등이 참여해 투명성과 대표성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민간보험사는 공공데이터를 자체적으로 상품개발에 활용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투명한 공개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전문학술지 등 학계의 객관적인 검증을 거치고 대학 및 공공연구소 등과의 협업연구를 통해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상품개발까지 이어지는 민간연구의 공공데이터 활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정보 주체의 이익, 과학적 연구 기준, 자료제공의 최소화 등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는 문제”라며 “민간보험사가 국민건강정보를 활용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기본원칙을 반영한 연구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