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시원, ‘시험 종료 직후’ 아닌 ‘합격자 발표 직후’라고 해명…불명확한 점은 인정
의대생들, “2018년 소송 패소 이후 계속해서 응시생 기만하고 편법 쓰고 있어”
국시원, “재채점 또는 이의제기 용도 촬영 아냐…안전사고·화재예방 목적” 반박
의대정원 증원 사태로 인해 역대 최악의 응시율을 기록한 ‘2025년도(2024년 시행) 제89회 의사국시 실기시험’에 난데없는 독소조항이 삽입됐다는 논란에 의대생들이 동요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마감된 제89회 의사국시 실기시험 응시생은 총 364명으로, 이는 전년도 응시자 3,212명의 11.3%에 불과하며 지난 2020년 의대생들이 의정갈등으로 의사국시를 집단으로 거부했던 423명보다도 낮은 수치다.
재응시생을 제외하면 의과대학 본과 4학년 학생의 90% 이상이 올해 국시를 거부한 것.
이처럼 가뜩이나 시험에 응시하는 의대생들이 적은 상황에서 국시원이 제89회 의사국시 실기시험 시행계획을 공고하면서 다소 의아한 문구를 집어넣어 의대생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2025년도부터 시험영상은 시험운영 종료 후 ‘즉시’ 폐기?
CCTV 영상 폐기는 언제, 왜, 어떤 방식으로 도입됐을까?
공고문에 따르면 실기시험 문항, 채점표, 채점기준표, 시험모니터링영상은 시험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비공개 대상이므로 공개하지 않는다.
논란은 그다음에 적힌 ‘시험모니터링영상은 시험운영 종료 후 즉시 폐기’라는 문구다.
이와 관련 일부 의대생들은 국시원이 CCTV 영상 즉시 폐기를 통해 이의제기를 노골적으로 원천차단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기시험 CCTV 영상은 국시원과 의대생들 모두에게 매우 예민한 이슈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2018년 CCTV 영상 공개와 관련해 국시원과 의대생들의 행정소송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의대생들의 일부 승소 판결이 나오면서 큰 이슈가 됐다.
의사국시 실기시험은 시행 첫해인 2010년도(2009년 시행)부터 2018년도(2017년 시행)까지만 해도 ‘CCTV 영상 폐기’라는 문구가 시행계획 공고문에 명확히 기재돼 있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의 공고문을 확인한 결과, 공교롭게도 2018년 행정소송 이후 문구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CCTV 영상 비공개 이유가 2019년도(2018년 시행) 실기시험의 경우 ‘안정적 시행 목적’, 2020년도(2019년 시행)는 ‘사고 및 화재예방 목적’, 2021년도(2020년 시행)는 ‘안전사고 및 화재예방 목적’으로 계속 변경됐다.
이어 2022년도(2021년 시행) 제86회 실기시험부터 ‘응시동영상은 실기시험의 안전사고 및 화재예방을 목적으로 촬영한 영상물로서 시험종료 20일 후 폐기한다’라는 기존에 없던 ‘폐기’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국시원은 2020년도 의사국시 실기시험부터 CCTV 영상을 시험 종료 20일 이내에 삭제해 왔다.
문제는 시행계획 공고문에 CCTV 영상을 삭제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시점은 그로부터 2년 후인 2022년도부터였다는 점인데, 그 이전까지는 응시생들이 합격자 발표일 전에 CCTV 영상이 자연스럽게 삭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했다는 의미다.
당시 국시원에 강한 의혹을 갖고 있던 의대생 A씨는 “국시원은 2018년 패소 및 정보공개 이후 이전에 없던 ‘CCTV 영상 폐기 기간’이라는 독소조항을 신설해 응시생들이 정신없을 사이에 영상을 삭제하고 있었다”며 “소송 이전에는 증거보전신청이 접수되기 전까지 1년가량 CCTV 영상을 보관했는데, 갑자기 20일 후 폐기라는 공지는 왜 하기 시작했는지 의문인 데다가, 응시생들이 이의 제기를 하고 싶어도 시험은 보통 11월 초에 끝나고 합격자 발표일은 12월에 이뤄지기 때문에 그때는 이미 CCTV가 삭제돼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실기시험 시행계획 공고문의 문구 변경은 의대정원 증원 사태 속에서 접수된 올해도 이어진 것이다.
‘시험 종료 후 20일 후 폐기’가 ‘시험운영 종료 후 즉시 폐기’로 말이다.
국시원의 적극 해명…“시험 끝나는 즉시 삭제한다는 뜻 아니다”
“시험운영 과정에는 합격자 발표도 포함”…즉, 발표 즉시 ‘폐기’
이와 관련 국시원은 ‘시험운영 종료 후 즉시 폐기’라는 문구가 다소 불명확해 오해할 만한 표현인 점은 인정하나, 지난해보다 CCTV 저장 기간은 더 길어져 개선됐다는 설명이다.
CCTV 자료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사용 목적이 다 하면 바로 파기하게 돼 있는 만큼 ‘20일 이내’라는 애매한 표현을 ‘즉시’로 변경했고, ‘시험운영 종료’라는 의미는 ‘시험운영’ 과정에 ‘합격자 발표’까지 포함된 것이니 결과적으로 ‘합격자 발표 즉시 폐기’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
국시원 관계자는 “조금 불명확하게 쓰인 면은 있는데, 시험운영이라는 것은 합격자 발표까지를 말하는 것”이라며 “실기시험 당일에 바로 바로 삭제한다는 게 아니라 합격자 발표를 하고 난 다음에 즉시 폐기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보관 날짜가 20일 이내여서 보통은 합격자 발표 전에 삭제됐지만, 올해는 합격자 발표를 하고 난 후 즉시 폐기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CCTV 보관 기간은 더 늘어나 전보다 나아졌다고 보면 된다”며 “개인정보보호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사항은 즉시 파기가 맞고, 그 시점을 합격자 발표로 명확히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CCTV의 촬영 목적은 재채점이나 이의제기가 아닌 실기시험의 안전사고 및 화재 예방을 위한 용도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 국시원이다.
아울러 국시원은 공식적인 이의신청 기간은 전산상의 점수 산출 오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용도이지, CCTV 영상을 응시생들에게 일일이 공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며 일각의 의혹에 선을 그었다.
국시원 관계자는 “CCTV 촬영은 안전사고 및 화재 예방 등을 위한 용도이지 재채점을 위한 것은 아닐뿐만 아니라 촬영과 삭제의 절차나 방법에 대해서는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법원 판례도 있다”며 “다른 시험들도 CCTV 녹화 영상으로 재채점을 하는 사례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국시원에 대한 ‘불신’
노골적으로 반복되는 공고문 변경에 오히려 ‘감탄’
반면 시험 당사자인 의대생들은 이런 국시원의 해명에도 불신이 가득한 모양새다.
과거 국시원과 소송 경험이 있는 한 의대생은 “이미 합격자 발표일 이전에 CCTV가 삭제되던 상황이었고, 2023년 소송에서도 국시원이 그 덕을 톡톡히 봤다”며 “20일 이내를 즉시로 바꿨다고 한들, 이로 인해 지난해보다 개선된 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끝까지 진실을 감추겠다는 의도만 더욱 명확히 한 것이기에 응시생 입장에서는 달라질 것도 없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CCTV 영상을 삭제하는 행위 자체가 국가기관인 국시원이 스스로 법을 곡해하고 편법을 권장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있다.
의대생 A씨는 “합격자 발표와 즉시 원본 서술형 답안지를 소각하는 시험은 없고, 더욱이 시험만 전담하는 공공기관이 개인정보의 당사자가 보존을 원하는 정보를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파기하는 것은 궤변”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인사혁신처는 기록관리기준표고시에 따라 답안지와 응시서류 등의 경력경쟁 채용시험 원자료가 민감한 개인정보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3~5년간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국시원은 2019년에 다수의 의대생들이 저항할 때는 저항이 극심할 것 같으니 몰래 CCTV를 폐기하다가 최근 들어 공고문을 더욱 노골적으로 변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감탄이 들고 솔직히 위협적이기까지 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2023년 9월 25일 시행된 의료법 개정안은 모든 수술방에 CCTV를 설치하고 환자 본인이 원한다면 녹화를 의무화해 환자와 의사 간 신뢰에 기여하고 있는데, 국시원은 수술 동의서에 수술방 CCTV를 포기하라는 독소조항을 넣은 뒤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꼴”이라며 “상식과 원칙보다 치부 감추기가 먼저라는 교훈을 미래 의사들에게 직접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부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