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정책연구소, 국민건강 침해 위험성 높은 비대면 진료 초진 절대 불가
대한가정의학과의사회, 산업 생존 위해 국민 건강권 양보하는 일 없어야
비대면 진료 중계 플랫폼 업체들의 무리한 초진 허용 요구에 의료계가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대면 진료 우선 원칙에 따라 비대면 진료는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는 의료계와 정부의 공통된 입장을 무시하고 플랫폼 업체들이 생명 연장을 위해 초진을 주장하는 것은 선을 넘은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플랫폼 산업의 생존을 위해 국민의 건강권을 양보하는 일 만큼은 반드시 막아내겠다는 의료계의 강력한 의지로 볼 수 있다.
비대면 진료 중계 플랫폼 업체들을 회원사로 둔 원격의료산업협의회는 최근 ‘비대면 진료 플랫폼 산업계 생존을 위협하는 재진 환자 중심의 비대면 진료 제도는 시대를 역행하는 신(新)규제법으로 정의한다’는 제목의 손편지를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재진 환자 중심으로 논의된 제도화 과정에 초진 환자까지 허용해 달라는 게 핵심이다.
해당 소식을 접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소장 우봉식, 의정연)는 비대면 진료를 통한 초진은 국민건강에 대한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플랫폼 업체의 주장은 들을 가치가 없다며 즉각 반발했다.
우봉식 소장은 “비대면 진료 초진은 국민건강 침해 위험성이 높고 안전성이 대면 진료보다 낮다”며 “대면 진료의 초진과정은 환자가 진료실을 걸어오는 순간부터 환자의 표정, 걸음걸이, 동작, 소리, 냄새 등 다양한 정보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면 진료의 첫 단계에서 의사가 사용하는 기본진찰 방법인 시진, 청진, 촉진, 문진, 타진 등을 통해 환자의 질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은 후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한 후속 과정으로 의사의 판단과 처방에 의해 의료기기 및 첨단 의료장비를 사용해 혈액검사, 영상검사, 기능검사 등을 시행하는데 비대면 진료 초진은 이 같은 대면 진료의 기본진찰 방법 중 촉진과 타진을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우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비대면 진료를 오랫동안 시행한 해외 국가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초진을 허용하지 않았고, 현재도 ‘재진 허용, 초진 불가’ 방침을 고수하며 초진의 위험성을 인지해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우 소장은 “재진에만 허용한다는 기본 원칙은 절대 흔들려선 안 되는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정부와 의료계 모두 동의한 상황에서 비대면 진료 중개 플랫폼 업체들의 초진 허용 주장은 매우 유감”이라며 “초진을 허용하면 마치 진술만으로 피의자의 범죄를 확정하는 것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텐데, 국민건강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방법을 책임도 없는 플랫폼 업체들이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언급했다.
대한가정의학과의사회(회장 강태경)는 3월 19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지난 2월 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가 비대면 진료 제도화를 위한 5대 원칙에 합의했으나, 플랫폼 관련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강태경 회장은 “사업 초기 다수의 플랫폼 업체들이 경쟁할 때는 특별한 문제가 없지만, 지배적 사업자가 등장할 경우 의료 공급자와 의료 수익자 모두 지배적 사업자에 의해 좌지우지돼 적절한 대체 및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대면 진료를 플랫폼 업체와 환자와의 계약·선택에 따른 하나의 서비스 산업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이용한 치료제의 하나로서 의사가 이를 적용해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손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환자에게 처방하는 체계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환자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약제도 제약회사가 생산하지만, 환자에게 공급되기 위해서는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가능하듯 중개 플랫폼 역시 디지털 서비스 업체에 의해 생산되더라도 환자에게 적용되려면 의사가 여러 플랫폼의 효과성 및 위해성을 주체적으로 판단해 처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강 회장은 “대한민국 법령상 면허를 교부받은 의료인에게만 의료를 허용해 환자 안전, 의료 질의 안정성, 법적 안정성, 규제 감독의 용이성 등을 담보하는 이치와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며 “편리함을 강조한 음식배달 플랫폼들도 처음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여러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플랫폼 업체들에 대한 규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산업계가 주장하는 데로 법안이 만들어지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다는 부정적 시선도 팽배했다.
정승진 가정의학과의사회 공보이사는 “닥터나우를 설치해서 잠깐 사용했을 뿐인데도 개인정보보호법 및 의료법 위반 소지가 다분한 것처럼 느껴졌다”며 “지금 상황은 조만간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비대면 진료가 불법이 되니 플랫폼 업체들이 불안감을 느껴 국민의 건강권을 양보하라고 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정 공보이사는 이어 “코로나19 때는 진단이 명확했기 때문에 초진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진단 과정에서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질환이 단 하루 만에 급성으로 악화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고 부언했다.
결국 복지부와 의협의 합의는 약간의 가이드라인일 뿐이지 쟁점이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것은 여전하니 비대면 진료 중계 플랫폼 업체들은 초진 허용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는 게 가정의학과의사회의 주장이다.
김성배 가정의학과의사회 총무부회장은 “조만간 비대면 진료가 불법이 되면 생존권을 위협받게 되는 플랫폼 업체들이 정부에게 산업계의 생존을 위해 국민 생명권을 양보하라는 것마냥 행동하고 있다”며 “의료는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일갈했다.
산업계가 과도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상운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은 최근 충청북도의사회 정기대의원총회에 참석해 “산업계에서 언론플레이를 계속 하는데, 복지부도 초진 허용 얘기는 꺼낼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며 “초진을 허용하면 비대면 진료 자체에 거국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이어 “지난해 의협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수임사항을 집행부에 일임할 때 전제조건이 재진만 허용한다, 2배의 수가를 요구한다, 의협 스스로 주도한다 등이었다”고 덧붙였다.